• 공지사항
  • 교구 보도자료
  • 교황청 뉴스
  • 담화문 메시지
HOME > notice > 담화문 메시지
[교황 메시지_0817] 아시아 주교들과 만남
작성자 : 방한준비위원회 작성일 : 2014-08-17 조회수 : 10451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6회 아시아 청년 대회에 즈음한 대한민국 사도 방문
(2014년 8월 13-18일)

 

아시아 주교들과 만남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연설

해미, 순교 성지
2014년 8월 17일, 일요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 충실하고자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은 이곳 성지에 함께 모인 여러분께 주님 안에서 한 형제로서 따뜻한 인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곳에 와서 저는 우리가 아직까지도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 순교자들이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이름 없는 성인들입니다. 이것은, 저에게 우리 교회들 안에 있는 수많은 거룩한 그리스도인들, 곧 어린이들, 청소년들, 남자들, 여자들, 노인들 …… 수많은 신자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그들은 성인들입니다. 신앙 생활을 꾸준히 이어가는 이 단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오직 주님께서만이 그들의 성덕을 알아주십니다. 한국 순교자들의 사랑의 증언은 비단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까지 축복과 은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가 그들 기도의 도움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의 충실한 목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환영 말씀을 해 주신 그라시아스 추기경님께 감사 드리며, 또한 연대를 이루어 각국 지역 교회의 효과적인 사목 활동 증진을 위하여 일하는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많은 다양한 문화가 생겨난 이 광활한 대륙에서, 교회는 유연성과 창의성을 발휘하여 대화와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증언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과업입니다. 사실, 대화는 아시아 교회 사명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아시아 교회」, 29항 참조). 그런데 다른 이들과, 또 다른 문화와 대화를 시도할 때, 무엇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겠습니까? 또 목표 지점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근본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분명 우리의 정체성, 곧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무에서,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 안개처럼 희뿌연 자아 의식으로는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대화를 시작할 수도 없습니다. 공감하고 진지하게 수용하는 자세로, 상대방에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열 수 없다면 진정한 대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관심이며,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러한 관심으로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의식하고 다른 이와 공감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대화의 출발점이라 하겠습니다. 자유롭게 열린 마음으로 의미 있는 대화를 하려면 우리 자신은 누구이며,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지, 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대화가 독백이 되지 않으려면, 생각과 마음을 열어 다른 사람, 다른 문화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두려움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움은 이러한 개방성에 대한 적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표현한다는 것이 언제나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우리는 항상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세속 정신에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 중 세 가지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상대주의라는 거짓된 빛입니다. 상대주의는 진리의 빛을 흐리게 하고, 우리 발이 딛고 선 땅을 뒤흔들며, 혼란과 절망이라는 종잡을 수 없는 상황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습니다. 상대주의는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쳐서, 급변하는 혼란스러운 세상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으며, 이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 궁극의 토대를 두고 있다.”(「사목 헌장」, 10항; 히브 13,8 참조)는 사실을 사람들이 잊어버리게 합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상대주의란 그저 하나의 사고 체계가 아니라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날마다 이루어지는 실천적 상대주의입니다.

두 번째로 세상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방식은 피상성입니다. 피상성은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기(필리 1,10 참조)보다는 최신의 유행이나 기기, 오락에 빠지는 경향을 말합니다. 덧없는 것을 찬양하는 문화, 회피와 도피의 길이 수없이 열려 있는 문화에서는, 이런 피상성이 사목에 중대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성직자들의 사목 활동과 그 이론에도 영향을 미쳐 신자들과 비신자들, 특히 탄탄한 교리 교육과 건전한 영성 지도가 필요한 청년들과의 직접적이고 유익한 만남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두지 않는다면, 우리 삶의 원칙인 진리는 후퇴하고 덕행은 형식에 불과하게 되며, 대화는 한갓 협상의 형태나 서로 서로 표면적인 합의로 전락하게 됩니다. 파장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표면적인 합의……이러한 피상성은 우리에게 큰 해를 끼칩니다.

또한 세 번째 유혹도 있습니다. 쉬운 해결책, 이미 가지고 있는 공식, 규칙과 규정들 뒤에 숨어 확실한 안전을 선택하려는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법규, 규정, 쉬운 해답 뒤에 숨었던 사람들과 맞서 싸우셨습니다……그들을 위선자라 부르셨습니다. 신앙은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그 본성이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해를 추구하며 증언을 불러일으킵니다. 선교를 낳습니다. 곧, 신앙은 우리가 담대하면서도 겸손하게 희망과 사랑을 증언하게 해 줍니다. 성 베드로 사도께서는 우리가 지닌 희망의 이유에 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라고 말씀하십니다(1베드 3,15 참조).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은 궁극적으로 하느님만을 경배하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섬기려는 조용한 노력에서, 그리고 우리가 믿는 것과 소망하는 것을 또 우리가 믿는 그분을 우리의 모범을 통하여 보여 주려는 조용한 노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2티모 1,12 참조).

 

다시 말씀 드리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살아 있는 믿음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 주님 안에 뿌리를 둔 정체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정체성만 가지고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은 부수적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살아 있는 신앙에 깊이 뿌리를 둔 우리의 정체성에서부터, 바로 이 깊은 실재로부터 우리의 대화가 시작되며, 이로부터 진지하고 솔직하고 가식 없이 일상의 대화와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또 좀 더 공식적인 대화의 기회에 스스로 나서도록 요청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므로(필리 1,21 참조)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에 대하여” 준비된 자세로 망설임이나 두려움 없이 말합시다. 그분 말씀의 단순성은 우리 삶의 단순성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우리 대화의 단순성에서 드러나며 우리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섬기는 우리 일의 단순성에서 드러납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또 다른 측면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열매 맺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주님과 대화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은총으로부터 생겨나고 그 은총으로 자라나기 때문에, 정의와 선과 평화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의 삶에서, 또 여러분에게 맡겨진 공동체의 삶에서 맺고 있는 열매에 대하여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진행되는 교리교육이나 청소년 사목에서, 번창하는 사회의 변두리에서 신음하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서, 그리고 사제직과 수도 생활에 대한 성소를 키워 내는 노력들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 결실들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까? 이것이 제가 드리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각자 거기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대화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분명한 정체성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능력도 요구됩니다. 대화가 이루어지려면 이러한 공감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을 듣는 것만이 아니라, 말로 하지는 않지만 전달되는 그들의 경험, 그들의 희망, 그들의 열망, 그들의 고난과 걱정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공감 능력은 영적 통찰력과 개인적 경험의 결실이며, 우리가 다른 이들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이게 하고, 그들이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까지도 들을 수 있게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전달하고자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화를 위해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열고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는 사려 깊은 마음가짐을 가져야만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으면,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여는 것?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곧,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집에, 내 마음에 들어오도록 해야 하고, 내 마음으로 상대를 맞아들이며, 상대에게 귀를 기울이려고 해야 합니다. 공감하는 능력은 진정한 대화를 가능하게 하며, 진정한 대화에서는 형제애와 인간애의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나 생각, 그리고 질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가 이에 대한 신학적 기초에 다다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아버지께 이르게 됩니다. 아버지는 우리 모두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같은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이러한 공감의 능력은 마음과 마음이 소통하는 진정한 만남을 이끌어 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만남의 문화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 이들의 지혜로 우리 자신이 풍성해지며 마음을 열고 다른 이들과 함께 더 큰 이해와 우정, 연대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교황님,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지만 개종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거나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여러분은 그렇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정체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성조 아브라함에게 주신 첫 계명이 무엇이었습니까? “내 앞에서 흠 없이 살아가라.” 그렇게, 나의 정체성과 나의 공감, 열린 마음으로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어갑니다. 나는 그를 내 편으로 끌어오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나는 그를 개종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베네딕토 교황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개종 권유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력으로 성장합니다.” 아버지 앞으로 함께 나아갑시다. 흠 없이 살아갑시다. 이 첫 계명을 지킵시다. 거기에서 만남이, 대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정체성과 열린 마음을 지니십시오. 이것이 더 깊은 이해와 우정과 연대로 가는 길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대화를 향한 우리의 투신은 강생의 논리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고, 우리와 함께 사셨으며, 우리가 하는 말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아시아 교회」, 29항 참조). 다른 이들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 저는 아직 성좌와 완전한 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아시아 대륙의 몇몇 국가들이 모두의 이익을 위하여 주저 없이 대화를 추진해 나가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정치적인 대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적인 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정복자로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정체성을 없애려고 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우리에게 가져오지만, 그들은 우리와 함께 걸어가기를 원한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분을 통해 때로는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세례를 청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며, 때로는 그렇지 않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우리 함께 걸어갑시다. 이것이 대화의 핵심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저를 형제로서 따뜻하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광활한 땅과 그 오랜 문화와 전통을 가진 아시아 대륙을 보면,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여러분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참으로 작은 양 떼(pusillus grex)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작은 무리이지만 그럼에도 복음의 빛을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참된 겨자씨입니다! 참으로 작은 씨…… 좋으신 목자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잘 아시고 모든 양 하나 하나를 사랑하시며, 여러분과 당신의 일치, 그리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당신 양 떼의 다른 모든 구성원들과 여러분의 일치를 이루도록 노력하는 여러분을 이끌어 주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시기를 빕니다. 이제 우리 모두 여러분의 교회와 아시아 대륙을 성모님께 맡겨 드립시다. 성모님께서는 오직 어머니만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 곧 여러분이 누구이고, 여러분의 이름이 무엇이며, 다른 이들과 더불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어머니로서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두 성모님께 기도를 바칩시다.

 

  •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