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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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신도의 자발적 신앙으로 시작한 교회
    한국교회는 평신도의 탐구에 의해 시작된 외국에서는 유례가 없는 독특한 교회이며, 수많은 순교자의 목숨을 건 순교가 있었기에 놀라운 성장을 이뤘다.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한자로 저술한 천주교 관계 서적들이 17세기 초 북경을 방문한 조선 사신들을 통해 조선에 도입되자 조선에는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낳게 됐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연구되던 서학은 실학사상을 토대로 서양기술을 도입하는 실천적 방향으로 진화한 데 이어 종교운동으로 번져나갔다. 서학에 대한 관심을 신앙으로 바꾼 이는 이벽(요한 세례자)이었고, 그의 권유로 이승훈(베드로)과 권철신(암브로시오)ㆍ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형제와 정약종(아우구스티노)가 복음을 받아들였다. 이벽은 급기야 1784년 이승훈(베드로)를 북경으로 보내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이벽의 집에서 동료들에게 세례를 주도록 했다. 초기 신앙인들의 선교로 조선 땅에는 성직자나 선교사 없이 신자 수가 5년 만에 4000명으로 늘어났다. 자생적으로 태동한 한국천주교회 공동체는 이후 베이징 주교에게 성직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고, 신분질서 속에서도 인간 존엄성과 평등을 실천하며 조상제사 금지령을 지키는 등 교회 가르침을 철저히 지켜나갔다. 조선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온 이들의 신앙은 결국 조정의 혹독한 탄압과 박해를 맞게 됐지만, 당시 신앙인들은 용기를 내어 신앙을 옹호하고 교회 공동체를 보호하면서 목숨을 바치거나 감금을 당한 채 죽임을 당했다.

○ 세계 교회의 도움을 받고 성장한 교회
    1950-1953년에 한국 민족이 겪은 한국전쟁은 교회는 물론 한국 민족 전체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이런 상황에서 사실상 모든 것을 잃고 깊은 좌절 속에서 신음하는 한국민을 위하여 세계교회가 사랑의 손길을 뻗쳤다. 세계 교회의 이러한 애덕의 실천은 한국 교회와 민족이 자신의 종교적, 사회적 생명력을 회복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때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세계 전역의 가톨릭 교회에서 많은 사제와 수녀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다. 또한 재정적으로도 미국 가톨릭구제회와 독일 미제레올, 오스트리아 부인회, 세계 교회의 카리타스 기구 등의 나눔이 이루어지면서, 한국 교회의 성장 동력으로 작용한다.
    한국 교회는 초기에 외국 신앙 공동체의 지원을 일정하게 생활 보조 형태로 제공하는 단계에 머물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단계를 거치면서 한국 교회는 단순 보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미제레올 등과 협력하여 자립형 개발 지원 방식으로 지원 형태를 변경해 간다. 그리하여 외국의 원조를 시민 사회의 성숙과 민족의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역량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의 7대 종교 양성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한 주체들을 질문하는 설문에서 한국인 성직자에 이어서 외방전교회와 해외 천주교원조기관, 그리고 수도회 등이 우선적으로 꼽힌 바 있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해외 신앙 공동체의 카리타스 실천을 민족의 자각과 부흥에 일정하게 기여하였다고 평가하면서 이들의 공헌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음을 말한다.
    1980년대 중반까지 해외 교회의 원조를 받았던 한국교회는 원조를 ‘받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로 역할을 전환하게 됐다. 북한은 물론 베트남, 중국, 방글라데시, 필리핀, 인도, 미얀마, 몽골 등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에 해외긴급구조, 국제개발협력 등을 전개한 한국교회는 1993년을 기점으로 현재까지 655개 사업을 지원했다.

    ○ 사회 복지 사목을 통한 지역사회의 복음화
    천주교가 20세기 한국 사회의 근대화에서 가장 크게 기여한 부문으로 “사회 복지”가 꼽히기도 하였는데, 가톨릭 교회의 사회 복지 활동은 해방 이후 1990년대를 거쳐 최근까지도 해외 원조 기구의 협력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이것은 해외 신앙 공동체의 카리타스 실천이 한국교회와 사회의 발전에 그만큼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반증한다.
    소록도와 나자로 마을, 꽃동네로 대변되는 한국 교회의 ‘돌보는 사목’은 한국 근대화에 기여한 분야 순위에서 첫째를 차지할 만큼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가톨릭 사회복지 단체가 사회에서 건강한 사회 복지 구현 주체로서 높은 신뢰를 받고 있는 것과 맞물려 지역 사회와의 복음적 소통을 구현해 가는 데 한국 가톨릭교회가 충실히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서 한 가지 특기할 것이 서울대교구가 1989년 44차 세계성체대회를 맞이하여 시작한 “한마음한몸운동”이다. 1989년 10월 4-8일에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성체대회를 준비하면서 서울대교구를 중심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이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과 나눔을 현대 세계에 육화시키고자 하는 기본 취지를 갖고 있었다. 이 운동은 1988년 10월 주교회의의 의결을 거치면서 서울대교구를 중심으로 전국으로 펼쳐졌는데, 성체성사의 정신을 실제 삶과 연결시켜 실천함으로써 성찬의 신비를 구현하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입양 결연 및 헌혈 운동을 시작으로 장기기증ㆍ조혈모세포기증ㆍ제대혈기증 같은 생명나눔운동과 창조질서보전을 위한 환경운동, 난치ㆍ희귀병 환자들에 대한 치료비 지원, 낙태방지 및 자살예방 같은 생명존중운동, 해외원조 및 해외봉사활동 같은 국제협력운동을 통해 교회와 사회에 생명 존중 및 나눔 문화의 토대를 마련했다. 인종과 종교, 사상과 국경을 초월하여 국내외의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인간의 존엄을 축복으로 누릴 수 있게 하고자 투신하면서 사회 복지 사목의 영역을 통합해 갔다. 또한 이 운동을 통하여 한국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신앙 공동체가 그리스도 신앙을 우리 문화 속에 실천적으로 뿌리 내리면서 신앙의 성숙을 이루었다.

    ○ 민족의 운명에 동참한 교회
    천주교회는 한국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서 60여년 한국 현대사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며 사회적 위상을 제고하고 있다.
    1962년 전국위원회를 조직한 'JOC'(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는 군부독재의 암울한 상황에서 소외된 노동자 권익을 옹호하며 가톨릭 노동운동을 대중화했다. 특히 70년대 한국주교단 시국선언은 독재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던 한국 사회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민주화의 길로 돌아서는 '동력'이 됐다. 73년 모자보건법 독소조항을 고발하는 사목교서 발표, 76년 인공 임신중절에 대한 주교단 선언은 저출산으로 어려움을 맞는 한국의 30년 앞을 내다본 탁견이었다. 1987년 인천교구 사제단의 호헌 철폐 및 민주 개선을 갈구하는 단식 돌입, 같은 해 김수환 추기경과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조작 발표, 89년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천주교 전국 공동위원회 조직 등 민주화운동 역시 한국천주교회의 두드러진 활동들이었다.
    66년 가톨릭농민회 창설로 시작된 농민운동은 90년대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설립으로 이어져 한국 사회에 우리 농업과 농촌현실을 돌아보게 하고 우리 농산물 생산과 가공, 유통에 이르는 우리 농산물 애용을 한국사회에 자리잡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이와 함께 모자보건법 폐지 운동(92년 한국 평협), 사형폐지 운동(92년 서울대교구 교도사목회), 낙태반대 운동(94년 7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민족 화해와 일치 운동(95년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발족) 등은 한국 사회에서 한국천주교회가 예언자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일치되고 사회와 함께하는 교회상을 구현하고 도덕적 권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신뢰를 주는 교회로서 사회적 위상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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