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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주요일정 > 방문 예정 기관·성지 > 명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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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가을,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고 자신의 집에서 교회예절 거행과 교리 강좌를 열게 된다. 그럼으로써 수도 한복판에 겨레 구원 성업의 터전을 닦았고 바로 이곳에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산 역사인 명동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훈, 정약전 3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됐으나 이 신앙 공동체는 이듬해 형조금리(刑曹禁吏)에게 발각돼 김범우가 경상도 단장으로 유배되면서 해체됐다. 그 후 1882년 명동은 한미수호조약의 체결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예견한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에 의해 성당 터로 매입된다. 블랑 주교는 이곳에다 우선 종현서당을 설립, 운영하면서 예비 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해 한불수호통상조약(1886년)을 체결한 이듬해인 1887년 5월, 대지를 마저 구입하면서 그 해 겨울부터 언덕을 깎아 내는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
이 때 신자들은 손수 팔을 걷어붙이고 정지 작업에 나섰는데 블랑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보고서에 이들의 신앙적 열성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남자 교우들은 사흘씩 무보수로 일하러 왔는데 그것도 12월과 1월의 큰 추위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이 일에 놀랄 만한 열성을 쏟았고 그들은 신앙과 만족감에서 추위로 언 손을 녹일 정도로 참아 내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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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트 신부가 1896년 선종하고 그 뒤를 이은 프와넬 신부에 이르러서야 성당 건축을 마무리 짓고 드디어 1898년 5월 29일 성령강림 대축일에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역사적인 축성식을 가졌다.
기공 후 무려 12년 만에 완공된 명동대성당은 순수한 고딕 양식 건물로 그 문화적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사적 제258호로 지정된 명동대성당이 준공된 후 그 지하 묘역에는 박해 당시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해 왔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첫 입국해 기해년 1839년 9월 12일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의 형을 받은 후 한강변 모래밭에 매장됐었다. 순교한지 약 20일 후 칠팔 명의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세 분의 유해를 거두어 지금의 서강대학교가 소재한 노고산에 4년간 매장했다. 그 후 유해는 1843년에 삼성산으로 이장됐다가 1901년에 이곳으로 모셔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