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방한 의의 > 광화문 시복의 역사적 순교자적 의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123위 시복식”이 수도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 앞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집전으로 거행된다. 18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조선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천주교의 신앙을 받아들여 순교를 당한다. (이들은 한국 초기의 신자 1세대로, 이들의 아들, 딸들은 1984년에 시성되었다.) 순교는 신앙적인 의미뿐 아니라 동시에 새로운 사회, 새로운 삶, 새로운 가치 구현이라는 사회적의미를 지니게된다. 광화문은 순교로 희생된 천주교 신자들의 피와땀,눈물이 배어있는 역사적 장소이다. 이곳에서 순교자들이 복자(福者)로 선포하는 장엄한 의식을 갖게된다. 그 의미를 짚어본다.
교황께서 주재하시는 시복식 미사가 경복궁 앞 광화문 광장으로부터 서울광장에 이르는 도심의 한 복판에서 봉헌되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국가의 상징로이기도 한 이곳은 조선시대 정부의 주요한 기관들이 위치해 있었다.
1) 형조
광화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는 조선시대 법률과 형옥, 그리고 노예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형조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한국천주교회 순교성인 103위 중 7분이 문초를 겪었으며, 이번에 시복되시는 하느님의 종 124위 가운데서도 역시 7분이 이곳에서 옥고를 치루셨다. 최초의 방인 사제 김대건 신부님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 김효임 골롬바, 김효주 아녜스 등이다. 훗날 이 분들 모두는 서소문 밖 네거리 처형장에서 참수를 당하신다.
1) 형조에서 문초를 받은 하느님의 종과 성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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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년도 | 성명 | 세례명 | 순교지 | 비고 |
신유박해(1801) | 최필공 | 토마스 | 서소문 밖 | 하느님의 종 |
신유박해(1801) | 최필제 | 베드로 | 서소문 밖 | 하느님의 종 |
신유박해(1801) | 윤운혜 | 루치아 | 서소문 밖 | 하느님의 종 |
신유박해(1801) | 정철상 | 가롤로 | 서소문 밖 | 하느님의 종 |
신유박해(1801) | 김천애 | 안드레아 | 전주 | 하느님의 종 |
신유박해(1801) | 유황검 | 아우구스티노 | 전주 | 하느님의 종 |
신유박해(1801) | 윤지헌 | 프란치스코 | 전주 | 하느님의 종 |
기해박해(1839) | 이광헌 | 아우구스티노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 | 남명혁 | 다미아노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 | 김효임 | 골롬바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 | 김효주 | 아네스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 | 김제준 | 이냐시오 | 서소문 밖 | 성인 |
병인박해(1866) | 전장운 | 요한 | 서소문 밖 | 성인 |
병인박해(1866) | 최형 | 베드로 | 서소문 밖 | 성인 |
2) 우포도청
세종문화회관이 위치한 당시 형조로부터 지금의 청계광장의 시작점에 위치한 일민미술관 혹은 동아일보 옛 사옥 터에 이르면 그곳에는 당시 도둑이나 범죄자를 잡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포도청이 위치해 있었다. 최근 종로 3가의 단성사가 위치해 있었던 좌포청과 함께 이곳들에서도 순교성인 103위 중 22분이 순교를 하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종 124위 가운데에는 다섯 분이 역시 이곳에서 순교를 하셨다. 최인길, 윤유일, 지황 등이 이에 속하는 분들이다. 모두가 옥사하셨거나, 교수형으로 죽고, 또는 죽을 때까지 매를 때리는 장살이라는 형식으로 순교에 이르셨던 분들이다.
2) 좌. 우 포도청에서 순교하신 하느님의 종과 성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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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년도 | 성명 | 세례명 | 순교형식 | 비고 |
을묘박해(1795) | 윤유일 | 바오로 | 포청옥 장사 | 하느님의 종 |
을묘박해(1795) | 최인길 | 마티아 | 포청옥 장사 | 하느님의 종 |
을묘박해(1795) | 지황 | 사바 | 포청옥 장사 | 하느님의 종 |
신유박해(1801) | 심아기 | 바르바라 | 포청옥 장사 | 하느님의 종 |
신유박해(1801) | 김이우 | 바르바라 | 포청옥 장사 | 하느님의 종 |
기해박해(1839) | 최경환 | 프란치스코 | 포청옥 옥사 | 성인 |
기해박해(1839) | 유대철 | 베드로 | 포청옥 교살 | 성인 |
기해박해(1839) | 정국보 | 프로타시오 | 포청옥 옥사 | 성인 |
기해박해(1839) | 장성집 | 요셉 | 포청옥 옥사 | 성인 |
기해박해(1839) | 이 바르바라 | 바르바라 | 포청옥 옥사 | 성인 |
기해박해(1839) | 김 루치아 | 루치아 | 포청옥 옥사 | 성인 |
기해박해(1839) | 이 카타리나 | 카타리나 | 포청옥 옥사 | 성인 |
기해박해(1839) | 조 막달레나 | 막달레나 | 포청옥 옥사 | 성인 |
기해박해(1839) | 유조이 | 체칠리아 | 포청옥 옥사 | 성인 |
기해박해(1839) | 김 데레사 | 데레사 | 포청옥 교살 | 성인 |
기해박해(1839) | 이 아가다 | 아가다 | 포청옥 교살 | 성인 |
기해박해(1839) | 민극가 | 스테파노 | 포청옥 교살 | 성인 |
기해박해(1839) | 정화경 | 안드레아 | 포청옥 교살 | 성인 |
기해박해(1839) | 허임 | 바오로 | 포청옥 옥사 | 성인 |
기해박해(1839) | 김성우 | 안토니오 | 포청옥 교살 | 성인 |
병오박해(1846) | 남경문 | 베드로 | 포청옥 교살 | 성인 |
병오박해(1846) | 한이형 | 라우렌시오 | 포청옥 교살 | 성인 |
병오박해(1846) | 정철염 | 카타리나 | 포청옥 옥사 | 성인 |
병오박해(1846) | 우술임 | 수산나 | 포청옥 교살 | 성인 |
병오박해(1846) | 임치백 | 요셉 | 포청옥 교살 | 성인 |
병오박해(1846) | 김임이 | 데레사 | 포청옥 교살 | 성인 |
병오박해(1846) | 이간난 | 카타리나 | 포청옥 교살 | 성인 |
3) 의금부
광화문 사거리에서 불과 10여 미터 채 떨어지지 않은 종각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제일은행 본점 터가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의금부가 위치해 있었던 곳이다.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열여섯 분이, 그리고 하느님의 종 124위중에 아홉 분이 이곳에서 국문을 받으셨고, 처형장으로 끌려가 순교하셨다. 최초의 중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님을 비롯해서 엥배르 주교님, 모방신부님, 샤스땅 신부님 등이 대표적인 분들이시다. 모두 이곳에서 국문을 당하시고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를 당하셨다. 그리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과 그 아들 정하상 등은 서소문 밖 네거리 처형장에서 참수를 당하셨다.
3)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은 것으로 기록된 하느님의 종과 성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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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년도 | 성명 | 세례명 | 순교지 | 비고 |
신유박해(1801) | 주문모 신부 | 야고보 | 새남터 | 하느님의 종 |
신유박해(1801) | 최창현 | 요한 | 서소문 밖 | 하느님의 종 |
신유박해(1801) | 정약종 | 아우구스티노 | 서소문 밖 | 하느님의 종 |
신유박해(1801) | 홍교만 | F. 하비에르 | 서소문 밖 | 하느님의 종 |
신유박해(1801) | 최필공 | 토마스 | 서소문 밖 | 하느님의 종 |
신유박해(1801) | 홍낙민 | 루카 | 서소문 밖 | 하느님의 종 |
신유박해(1801) | 강경복 | 수산나 | 서소문 밖 | 하느님의 종 |
신유박해(1801) | 유황검 | 아우구스티노 | 전주 | 하느님의 종 |
신유박해(1801) | 윤지헌 | 프란치스코 | 전주 | 하느님의 종 |
기해박해(1839) | 엥베르주교 | 라우렌시오 | 새남터 | 성인 |
기해박해(1839) | 모방신부 | 베드로 | 새남터 | 성인 |
기해박해(1839) | 샤스탕신부 | 야고보 | 새남터 | 성인 |
기해박해(1839) | 유진길 | 아우구스티노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 | 정하상 | 바오로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 | 조신철 | 가롤로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 | 남이관 | 세바스티아노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 | 김제준 | 이냐시오 | 서소문 밖 | 성인 |
병인박해(1866) | 베르뇌주교 | 시메온 | 새남터 | 성인 |
병인박해(1866) | 브르티느에르 | 유스토 | 새남터 | 성인 |
병인박해(1866) | 볼리외 신부 | 베르나르도 | 새남터 | 성인 |
병인박해(1866) | 도리신부 | 베드로 | 새남터 | 성인 |
병인박해(1866) | 남종삼 | 요한 | 서소문 밖 | 성인 |
병인박해(1866) | 최형 | 베드로 | 서소문 밖 | 성인 |
병인박해(1866) | 정의배 | 마르코 | 새남터 | 성인 |
병인박해(1866) | 전장운 | 요한 | 서소문 밖 | 성인 |
4) 전옥서
의금부 터와 마주한 지금의 영풍문고 자리에는 당시 전옥서가 있었다. 짧게는 한 달, 길게는 4년까지 이곳에서 고초를 겪으셨던 순교성인들과 하느님의 종들이 적지 않은 곳이다.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한 분이신 이호영 성인께서는 이곳에서 무려 4년을 갇혀 계셨고, 급기야 여기서 옥사 순교하신다. 그 외 대표적인 분들이 정철상 같은 분들이시다. 기록에 의하면 모두 열일곱 분이 이곳에 계셨으며, 역시 모두가 훗날 서소문 밖 네거리 처형장에서 참수를 당하신다.
4) 전옥서에 수감되었던 하느님의 종과 성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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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년도 | 성명 | 세례명 | 순교지 | 비고 |
신유박해(1801) | 유황검 | 아우구스티노 | 전주 | 하느님의 종 |
신유박해(1801) | 윤지헌 | 프란치스코 | 전주 | 하느님의 종 |
신유박해(1801) | 강완숙 | 골롬바 | 서소문 밖 | 하느님의 종 |
신유박해(1801) | 최필제 | 베드로 | 서소문 밖 | 하느님의 종 |
신유박해(1801) | 김현우 | 마태오 | 서소문 밖 | 하느님의 종 |
기해박해(1839) | 이호영 | 베드로 | 전옥서 옥사 | 성인 |
기해박해(1839) | 남명혁 | 다미아노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 | 정정혜 | 엘리사벳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 | 김효임 | 골롬바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 | 김효주 | 아녜스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 | 김제준 | 이냐시오 | 서소문 밖 | 성인 |
병인박해(1866) | 전장운 | 요한 | 서소문 밖 | 성인 |
병인박해(1866) | 최형 | 베드로 | 서소문 밖 | 성인 |
5) 서소문 형장
당시 광화문과 그와 연접해 있었던 길들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성지인 ‘서소문 밖 네거리, 처형장’에 이르는 길은 죽음의 길, 순교의 길이 아닐 수 없었다. 때론 그 길이 당고개와 새남터로 이어져 있었고, 때론 그 길이 절두산과 더 멀리 조선방방 곡곡에 두루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범죄자가 되고, 중죄인이 되고, 그래서 때론 노예가 되어 팔리기도 하고, 때론 목숨마저도 내어놓아야 했던 그 참담한 현실이 한국 최초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 땅의 삶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금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과 함께 거행되는 광화문에서의 시복미사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시복시성특별위원회 위원장인 안명옥 주교는 시복시성(諡福諡聖)을 한마디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증거이며 선포”라고 말했다. 하느님 안에 부활한 참 생명을 살고자 했던 성인들이셨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부활안에서 완성된 것처럼, 이곳에서 순교하시고, 또 순교의 길을 걸으신 우리 신앙의 선조들께서도 그 같은 열망 안에 당신들을 희생하셨다.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과 마찬가지로 이미 부활하신 순교성인들과 시복의 대상이신 하느님의 종 124위는 금세기에 우리가 살아가야 할 진정한 믿음이 아닐 수 없다.
순교자들의 신앙을 결과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창조했다. 신분의 귀천이 있었고, 사상의 자유가 없었다. 물론 신앙의 자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들은 이 모든 현실의 제약들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진정으로 그 분들은 창조적인 사람들이었다. 남존여비, 양반과 상놈이라는 신분의 귀천이 엄연히 존재하던 사회였다. 조선시대 신분제 사회에서 천주교인이란 의미는, 그 자신들에게는 상당히 혁명적인 사랑이었음이 분명하다. 순교자들의 자기희생이 있어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살아가는 참된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번에 시복되는 124위 중 황일광(시몬)의 삶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1757년 충청도 홍주에서 천민으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몹시 어렵게 보냈다. 그러나 1792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을 통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그의 모든 삶이 기쁨으로 바뀌었다.
황일광은 입교 후 상상도 못한 대접을 신자들에게 받았다. 신자들은 그가 백정임을 알았지만 똑같이 대했다. 신분제도가 철저했던 조선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황일광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똑같은 형제로 대해주는 교우들에게 감동해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두 개의 천당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됐고 관헌들이 무자비한 형벌을 가하며 배교할 것을 강요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1802년 1월 30일 고향인 홍주에서 참수를 당했다. 신분제도를 뛰어넘는 가톨릭교회의 보편적 형제애는 황일광이 이 세상에서 천국을 살게 했고, 죽어서도 천국을 살게 했다.
천주교는 1784년 한국에 전래된 이후, 2세기 이상에 걸친 역사과정을 통해서 민족과 인류의 구원에 대한 사명을 수행해 왔다. 한국 천주교회는 19세기 이후 서구 문화의 전파자로 민중에 대한 구원을 설파하였고, 1970년대 이후의 한국교회는 과도기 한국 사회의 이정표로 그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이제 2000년대 한국천주교회가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비상하려는 시점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123위 시복식’을 갖게 된 것은 정말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시복식은 순교자들이 보여준 ‘보편적 형제애’를 다시 한 번 가톨릭 교우들 뿐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국민과 더불어 나눌 수 있는 화해와 일치의 場이 되리라 믿는다.
‘보편적 구원’과 ‘보편적 형제애’는 우리 교회의 꿈이고 미래이며 현실이다. 보편적 형제애를 통해 신앙을 증거 한 초기 신앙 선조들의 사상은 돈, 신분, 학벌, 직업 때문에 차별화돼 가는 오늘의 교회와 세상과 우리들에게 큰 깨우침을 준다.
이런 의미에서 시복식을 대한민국의 중심인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거행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편적 형제애’를 내외적으로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화문 광장’이 새로운 ‘아레오파고’(사도 17,16-34)가 되기를 희망한다.
※ 도표는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발간한 책 -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123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