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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4위 약전
강완숙 (골롬바)
출생년도 | 1761 | 남녀 | 녀 | 출생지 | 충청도 내포 | 직업 | 회장 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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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연령 | 40 | 순교일 | 1801. 7. 2 | 순교지 | 한양 서소문밖 | 순교방법 | 참수 |
강완숙(姜完淑) 골롬바는 1761년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양반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지혜로움이 뛰어나고 정직하여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1801년에 순교한 홍필주(필립보)는 그녀의 아들이다.
장성한 뒤 덕산 지방에 살고 있던 홍지영의 후처로 들어간 강완숙 골롬바는 혼인한 지 얼마 안되어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런 다음 이에 관한 책을 얻어 읽는 가운데 그 신앙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그녀는 “천주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고, 그 종교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올바르니 그 도리가 반드시 참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이 후 골롬바는 신앙에 대한 열정과 극기를 바탕으로 교리를 실천해 나갔으며, 그녀의 행동은 누구나 감탄할 만한 정도가 되었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보살펴 주다가 자신이 도리어 옥에 갇힌 적도 있었다. 또 그녀는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인 필립보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편만은 입교시킬 수가 없었고, 오히려 신앙 때문에 남편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후 남편은 첩을 얻어 따로 생활하였다.
어느 날 골롬바는 한양의 신자들이 교리에 밝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에 그녀는 시어머니와 아들 필립보와 의논한 뒤 함께 상경하였고, 이후로는 신자들과 왕래하면서 생활하였다. 또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시작되자, 이를 위해 노력하는 교우들에게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어 주었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게 되자, 골롬바는 주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를 도와 활동하였다. 이때 주 신부는 그녀의 인품을 알아차리고 여회장으로 임명하여 신자들을 돌보도록 하였다.
1795년 을묘박해가 일어나자 골롬바는 자신의 집을 주 신부의 피신처로 내놓았다.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 집은 관헌이 들어가 수색할 수 없다는 조선 사회의 풍습 때문이었다. 이 후 그녀는 주 신부의 안전을 위해 자주 이사를 하였으며, 그때마다 그 집은 신자들의 집회 장소로 이용되었다. 윤점혜(아가다)가 동정녀 공동체를 이끌어 나간 곳도 골롬바의 집이었다.
골롬바는 지식과 재치를 겸비하였으므로 여러 사람들을 권유하여 입교시킬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지체 높은 양반 부녀자들도 있었고, 과부?머슴?하녀도 있었다. 왕실 친척인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가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 것도 골롬바 덕택이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한결같이 “골롬바는 슬기롭게 모든 일을 권고하였으며, 열심한 남자 교우들도 기꺼이 그의 교화를 받았다. 그것은 마치 망치로 종을 치면 소리가 따르는 것과 같았다.”고 말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골롬바는 그 동안의 활동으로 인해 즉시 관청에 고발되었고, 4월 6일(음력 2월 24일) 집안에 함께 있던 사람들과 같이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주문모 신부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골롬바로부터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굳은 신앙심은 형리들조차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3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골롬바는 신심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함께 갇혀 있는 동료들을 권면하면서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40세였다.
형조에서는 사형 선고를 내리면서 이렇게 죄목을 붙였다. “강완숙은 천주교에 깊이 빠져 이를 널리 전파하였고, 6년 동안 주문모를 숨겨주면서 남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불러들여 천주교에 물들게 하였다.” 이에 대해 골롬바는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하였다.
“이미 천주교를 배웠고 스스로 ‘죽으면 즐거운 세상(즉 천당)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형벌을 받아 죽을지라도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고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장성한 뒤 덕산 지방에 살고 있던 홍지영의 후처로 들어간 강완숙 골롬바는 혼인한 지 얼마 안되어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런 다음 이에 관한 책을 얻어 읽는 가운데 그 신앙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그녀는 “천주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고, 그 종교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올바르니 그 도리가 반드시 참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이 후 골롬바는 신앙에 대한 열정과 극기를 바탕으로 교리를 실천해 나갔으며, 그녀의 행동은 누구나 감탄할 만한 정도가 되었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보살펴 주다가 자신이 도리어 옥에 갇힌 적도 있었다. 또 그녀는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인 필립보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편만은 입교시킬 수가 없었고, 오히려 신앙 때문에 남편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후 남편은 첩을 얻어 따로 생활하였다.
어느 날 골롬바는 한양의 신자들이 교리에 밝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에 그녀는 시어머니와 아들 필립보와 의논한 뒤 함께 상경하였고, 이후로는 신자들과 왕래하면서 생활하였다. 또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시작되자, 이를 위해 노력하는 교우들에게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어 주었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게 되자, 골롬바는 주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를 도와 활동하였다. 이때 주 신부는 그녀의 인품을 알아차리고 여회장으로 임명하여 신자들을 돌보도록 하였다.
1795년 을묘박해가 일어나자 골롬바는 자신의 집을 주 신부의 피신처로 내놓았다.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 집은 관헌이 들어가 수색할 수 없다는 조선 사회의 풍습 때문이었다. 이 후 그녀는 주 신부의 안전을 위해 자주 이사를 하였으며, 그때마다 그 집은 신자들의 집회 장소로 이용되었다. 윤점혜(아가다)가 동정녀 공동체를 이끌어 나간 곳도 골롬바의 집이었다.
골롬바는 지식과 재치를 겸비하였으므로 여러 사람들을 권유하여 입교시킬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지체 높은 양반 부녀자들도 있었고, 과부?머슴?하녀도 있었다. 왕실 친척인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가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 것도 골롬바 덕택이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한결같이 “골롬바는 슬기롭게 모든 일을 권고하였으며, 열심한 남자 교우들도 기꺼이 그의 교화를 받았다. 그것은 마치 망치로 종을 치면 소리가 따르는 것과 같았다.”고 말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골롬바는 그 동안의 활동으로 인해 즉시 관청에 고발되었고, 4월 6일(음력 2월 24일) 집안에 함께 있던 사람들과 같이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주문모 신부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골롬바로부터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굳은 신앙심은 형리들조차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3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골롬바는 신심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함께 갇혀 있는 동료들을 권면하면서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40세였다.
형조에서는 사형 선고를 내리면서 이렇게 죄목을 붙였다. “강완숙은 천주교에 깊이 빠져 이를 널리 전파하였고, 6년 동안 주문모를 숨겨주면서 남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불러들여 천주교에 물들게 하였다.” 이에 대해 골롬바는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하였다.
“이미 천주교를 배웠고 스스로 ‘죽으면 즐거운 세상(즉 천당)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형벌을 받아 죽을지라도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고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