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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4위 약전
서석봉 (안드레아)
출생년도 | 남녀 | 남 | 출생지 | 직업 | |||
---|---|---|---|---|---|---|---|
순교연령 | 순교일 | 1815. 말 | 순교지 | 경상도 대구 | 순교방법 | 옥사 |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구성열(바르바라)의 남편이며, 1815년 대구에서 옥사로 순교한 최봉한(프란치스코)의 장인이다. 훗날 신자들 사이에서는 그가 ‘손골(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동천리) 박씨(朴氏)의 외조부’라고 전해져 왔다.
안드레아가 어디에서 태어나 언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과부 바르바라와 혼인한 안드레아는 그 후 사위 프란치스코 부부와 함께 교우들이 모여 사는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창송군 안덕면 노래2동)으로 이주하여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1815년의 부활 대축일에 밀고자를 앞세우고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경주 진영에서는 안드레아에게 문초와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여기에 굴하지 않았고, 경주 관장은 그를 아내와 사위 등과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대구에서도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형벌을 받았지만, 이를 백절불굴의 항구심으로 참아내면서 신앙을 고수하였다.
이후 서석봉 안드레아는 동료들과 함께 1815년 11월 18일(음력 10월 18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형벌로 인해 쇠약해진 탓에 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중에 순교하고 말았다. 당시 대구 감사가 그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서석봉과 구성열 부부는 함께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뉘우칠 줄을 모릅니다.”
안드레아가 어디에서 태어나 언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과부 바르바라와 혼인한 안드레아는 그 후 사위 프란치스코 부부와 함께 교우들이 모여 사는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창송군 안덕면 노래2동)으로 이주하여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1815년의 부활 대축일에 밀고자를 앞세우고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경주 진영에서는 안드레아에게 문초와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여기에 굴하지 않았고, 경주 관장은 그를 아내와 사위 등과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대구에서도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형벌을 받았지만, 이를 백절불굴의 항구심으로 참아내면서 신앙을 고수하였다.
이후 서석봉 안드레아는 동료들과 함께 1815년 11월 18일(음력 10월 18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형벌로 인해 쇠약해진 탓에 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중에 순교하고 말았다. 당시 대구 감사가 그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서석봉과 구성열 부부는 함께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뉘우칠 줄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