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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4위 약전
이도기 (바오로)
출생년도 | 1743 | 남녀 | 남 | 출생지 | 충청도 청양 | 직업 | 도공 |
---|---|---|---|---|---|---|---|
순교연령 | 55 | 순교일 | 1798. 7. 24 | 순교지 | 충청도 정산 | 순교방법 | 장사 |
1743년 충청도 청양에서 태어난 이도기(李道起) 바오로는 고향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본래 그는 글을 알지 못하였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천주교의 덕행만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후 바오로는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모두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데 사용하였다. 또 천주교 신앙 때문에 여러 가지로 위협을 받게 되자 이곳 저곳으로 피해 다니며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가족과 함께 청양을 떠나 산 너머에 있는 정산으로 이주한 뒤, 그곳 옹기점에 터전을 잡았다.
1797년, 바오로의 나이 54세가 되었을 때 정사박해가 발생하였다. 그때 이 소식을 들은 인근의 한 비신자가 와서 ‘천주교인들의 두목으로 고발하겠다’고 그를 위협하였다. 이에 겁이 난 그의 아내가 도망할 것을 권하였지만, 그는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일을 하려 하지 않았고, 신입 교우들이 자신의 행동에 걸려 넘어질 것을 염려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그 해 6월 8일, 이도기가 집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한 떼의 포졸들이 나타나 그를 체포하였다. 이내 포졸들은 십자고상과 교회 서적 몇 권을 찾아낸 뒤, 그에게 천주교 신자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하면서 매질을 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산 관아로 끌려간 바오로는 자주 관장 앞으로 끌려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때때로 포졸들은 그를 장터로 끌고 나가 모욕을 주거나 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으며, 배교를 강요하는 관장 앞에서 용감하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곤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도기 바오로는 자주 굶주려야 하였고, 혹독한 추위로 고통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끊임없이 천주를 생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는 천사의 말씀을 전해 주는 목소리를 듣고는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럭저럭 1797년이 지나고, 1798년 새해가 밝았다. 바오로는 다시 관장 앞으로 끌려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하루는 관장이 벼슬을 주겠다고 회유하자, 그는 “정산 고을을 전부 주신다 해도 천주를 배반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마음이 약해질 것을 두려워하여 옥으로 찾아오는 아내와 교우들이 물리쳤다.
6월 10일 아침, 포졸들이 와서 사형 집행일이 되었다고 알려 주자, 바오로는 기쁨에 넘쳐 어찌할 줄을 몰라하였다. 이윽고 그는 포졸들에게 이끌려 정산 형장으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주변에 모인 비신자들까지 이 형벌에 가세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배교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성모 마리아여, 당신에게 하례하나이다.”라고 외쳤다.
바오로는 여러 차례 실신하였고,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매를 맞았다. 그리고 버려진 채로 있게 되었다. 이틀 후 저녁 무렵, 관장은 그의 죽음이 궁금하였는지 가서 살펴보고 ‘죽지 않았으면 아주 죽여 버리고 오라’고 명령하였다. 포졸들은 이 명령에 따라 그의 몸을 잔인하게 짓이겨버렸다.
이제 바오로의 몸은 더 이상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니, 그때가 1798년 7월 24일(음력 6월 12일)로,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55세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관장의 명에 따라 묻혀졌는데, 7~8일 후 정산에서 조금 떨어져 사는 교우들이 그 시신을 비밀리에 찾아다가 그들의 마을에 안장하였다.
이후 바오로는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모두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데 사용하였다. 또 천주교 신앙 때문에 여러 가지로 위협을 받게 되자 이곳 저곳으로 피해 다니며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가족과 함께 청양을 떠나 산 너머에 있는 정산으로 이주한 뒤, 그곳 옹기점에 터전을 잡았다.
1797년, 바오로의 나이 54세가 되었을 때 정사박해가 발생하였다. 그때 이 소식을 들은 인근의 한 비신자가 와서 ‘천주교인들의 두목으로 고발하겠다’고 그를 위협하였다. 이에 겁이 난 그의 아내가 도망할 것을 권하였지만, 그는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일을 하려 하지 않았고, 신입 교우들이 자신의 행동에 걸려 넘어질 것을 염려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그 해 6월 8일, 이도기가 집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한 떼의 포졸들이 나타나 그를 체포하였다. 이내 포졸들은 십자고상과 교회 서적 몇 권을 찾아낸 뒤, 그에게 천주교 신자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하면서 매질을 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산 관아로 끌려간 바오로는 자주 관장 앞으로 끌려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때때로 포졸들은 그를 장터로 끌고 나가 모욕을 주거나 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으며, 배교를 강요하는 관장 앞에서 용감하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곤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도기 바오로는 자주 굶주려야 하였고, 혹독한 추위로 고통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끊임없이 천주를 생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는 천사의 말씀을 전해 주는 목소리를 듣고는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럭저럭 1797년이 지나고, 1798년 새해가 밝았다. 바오로는 다시 관장 앞으로 끌려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하루는 관장이 벼슬을 주겠다고 회유하자, 그는 “정산 고을을 전부 주신다 해도 천주를 배반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마음이 약해질 것을 두려워하여 옥으로 찾아오는 아내와 교우들이 물리쳤다.
6월 10일 아침, 포졸들이 와서 사형 집행일이 되었다고 알려 주자, 바오로는 기쁨에 넘쳐 어찌할 줄을 몰라하였다. 이윽고 그는 포졸들에게 이끌려 정산 형장으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주변에 모인 비신자들까지 이 형벌에 가세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배교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성모 마리아여, 당신에게 하례하나이다.”라고 외쳤다.
바오로는 여러 차례 실신하였고,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매를 맞았다. 그리고 버려진 채로 있게 되었다. 이틀 후 저녁 무렵, 관장은 그의 죽음이 궁금하였는지 가서 살펴보고 ‘죽지 않았으면 아주 죽여 버리고 오라’고 명령하였다. 포졸들은 이 명령에 따라 그의 몸을 잔인하게 짓이겨버렸다.
이제 바오로의 몸은 더 이상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니, 그때가 1798년 7월 24일(음력 6월 12일)로,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55세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관장의 명에 따라 묻혀졌는데, 7~8일 후 정산에서 조금 떨어져 사는 교우들이 그 시신을 비밀리에 찾아다가 그들의 마을에 안장하였다.